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6.25 전쟁/전쟁의 전개 (문단 편집) === 스미스 특수임무부대의 투입 === [anchor(찰스 스미스)] 1950년 7월 5일경 [[경기도]] [[오산시]] 죽미령에서, [[북한군]]과 [[유엔군사령부|UN군]]의 첫 교전인 [[오산 전투]]가 일어났다. 이때 미 육군 제8군 제24보병사단 제21연대 제1대대, 대대장의 이름을 따서 이른바 '스미스 특수임무부대'(Task Force Smith) 혹은 '스미스 대대'라 칭하는 부대가 전투에 임했다. 대대장 찰스 스미스( Charles Bradford Smith , 1916~2004) 중령은 1916년 생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만 34세로, [[주일미군]]에서 지휘관으로 근무하다가 한국전쟁에 자신이 지휘하던 부대를 이끌고 투입되었다. 미군은 이 전투에서 540명([[포병]] 134명 포함) 중 무려 181명([[전사(죽음)|전사]] 150명, [[실종]] 31명)의 병력 손실을 입고 퇴각한다. 이 전투에서 찰스 스미스는 자신의 대대가 궤멸적 타격을 입는 상황에서도 살아남아 6.25 전쟁이 끝날 때까지 계속 참전했으며, 최종계급은 [[준장]]으로 1965년에 퇴역했다. 이후 [[2004년]]에 88세를 일기로 천수를 모두 누리고 작고했다.[[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20&aid=0000248646|한국전 첫 전투 美軍 스미스 특공대장 별세]] 이 스미스 특수 임무 부대는 대대장 찰스 스미스 중령 이하 총원 406명에 2개 중대로 이루어진 1개 보병대대와 52야포대대 A포대 134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특수임무부대답게 당시 주일미군에서 정예병 취급을 받는 인원을 선정해서 배치하였다. 스미스 특수임무부대의 정확한 편제는 다음과 같았다. * 대대본부 - 대대장 찰스 스미스 중령(Lcl. Charles B. Smith), 부대대장 대위 * 대대 화기소대 - 소대장 소위 * 제B중대 - 중대장 찰스 토머스 중위(Lt. Charles Thomas) * 제C중대 - 중대장 리처드 W. 다쉬머 대위(Cpt. Richard W. Thasimmer) * 제52포병대대 제A포대 - 제52포병대대장 밀러 페리 중령 (Lcl. Miller O. Perry) 어쨌거나 스미스 대대는 인원이 완편대대와 비슷해도 편제가 이렇다 보니 이 대대의 장교 총원이 15명 안팎에 불과했다. 원래 정상적인 대대는 3개의 보병중대와 1개의 화력지원중대에 1개의 (비전투) 지원중대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중대장이 5명이어야 하지만 스미스 대대는 보병중대가 단 둘 뿐이었고, 다른 중대들도 편제수에 미달이었으며 중대장부터 이미 2명밖에 되지 않았다. 게다가 그나마 [[영관급 장교]]도 대대장인 찰스 스미스 본인밖에 없었으며 나머지는 모두 대위 이하의 초급 군인들뿐이었고 장교 중에서 전투 경험자는 1/3이며, 병사들 중에서 전투 경험자는 단지 1/6일 정도로 숙련도가 낮았다. 그나마 주일미군 중 가장 사기가 높고 상태가 좋은 부대라고 보낸 게 이렇다. 보병은 7월 1일 오전 8시 45분에 이타즈케 공군기지를 이륙했고 수원 비행장으로 출발했다. 한편 A포대는 배로 부산까지 간 후, 철도를 이용해 수원에서 보병대대와 합류, 한국군을 붙잡고 한강에서 지연전을 펼칠 계획이었다. 그러나... 6월 30일 수원에서 미군 정찰기가 한국군을 북한군으로 오인해 수원으로 북한군이 들어오고 있다고 보고했다. 오보를 들은 연합군은 재빨리 수원 비행장을 포기했다. 뒤늦게 오보라는 것을 알았지만 비행장은 사용할 수 없는 상태였다. 결국 스미스 부대를 태운 수송기는 악천후를 뚫고 7월 1일 부산에 착륙, 7월 3일 대전에 도착해 4일 오산에서 포병들과 합류한다. 5일이 되자 북한군이 이들의 진지로 전차를 내세우고 진격했다. A 포대의 105mm M101 야포 6문과 화기소대의 75mm 무반동총 둘로 전차를 공격했지만 무반동총은 전차를 관통하지 못했고, 고폭탄이 전차 주변의 보병들을 쓸어버리긴 했지만 전차 자체에는 큰 피해가 없었다. 전차는 더 다가왔고 이제 보병들이 바주카를 발사했다. 2.36인치 바주카는 T-34의 장갑을 어떤 방향에서든 뚫지 못했다. 그러나 105mm 포의 대전차고폭탄은 효과적이어서 삽시간에 T-34 둘을 돈좌시켰다. 하지만 대전차고폭탄은 포대 전체에 6발 뿐이었고, 이게 다 떨어지자 다시 고폭탄을 쏘아대서 한 대의 궤도를 파괴하는 데 성공한다. 이 와중에 더 많은 북한군이 접근하자 스미스 부대는 105mm 야포 사격으로 전차를 하나 더 돈좌시키고 몇 대에 피해를 주었으며 적 보병들과도 교전에 들어갔다. 그러나 동쪽에서 포격과 함께 더 많은 북한군이 접근하자 퇴각한다. 통신의 혼선으로 부대간의 연락이 끊기자 후퇴는 곧 패주로 변했다. 이 전투에서 스미스 대대는 150명의 전사자를 냈는데 그 전사자 중에는 부대대장이 포함되어 있었다.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attle_of_Osan_Map.jpg|width=100%]] || || 당시 상황을 보여준 작전도 || 최초로 파견된 [[미군]] 부대인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는 고작 75mm 무반동총과 2.36인치 바주카로 무장하고 있었으며 방어진지를 구축하여 도로를 방어하려 하였으나 인민군과의 전력차가 너무 커서 결국 큰 피해를 입고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입장에선 분한 일이지만 북한군의 고급 인력들 중엔 [[중일전쟁]]이나 [[국공내전]]에서 [[마오쩌둥]]의 군대 치하에서 일본군과 국부군을 상대로 피터지게 싸우다 온 베테랑들이 많았던 데다 북한군이 사용하던 무기/전차들은 소련이 북한에 지원한 것들로 일본군이 사용하던 경전차들과는 성능면에서 차원이 다른 물건들이었다. 미군 입장에서는 그때까지 T-34/85 전차를 구경도 해본 적이 없었기에 그 위력을 알지 못하고 일본군 전차처럼 쉽사리 뚜껑을 딸 수 있을 것이라 여겼던 듯하다. 어느 [[미군]]은 [[북한군]]의 T-34/85가 돌파하는 것을 보고 '''쟤들 우리가 [[한국군]]인 줄 아나봐'''라고 말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러나 막상 전투가 시작되자 보유한 대전차화기의 공격 상당수를 방호해내는 북한군의 전차에 그대로 밀려버렸다. T-34/85 전차는 [[경사장갑]]을 채용하여 방어력이 중량에 비해 우수한 전차였고, 게다가 스탈린이 북한에 전차를 보낼 때 전차의 장갑을 조금 더 두껍게 해서 보냈다고 하는 헛소문까지 그럴듯하게 퍼졌다.[[http://www.army.mil.kr/history/%C0%DA%B7%E1%BD%C7/%BA%CF%B9%AB%B1%E2/625nw09.htm|이형근 장군의 증언]] 결국에는 야포와 같은 중장비를 거의 다 잃어버린 채 남쪽으로 후퇴하다가 상당수가 전사하거나 [[인민군]]에게 붙잡혀 [[포로]]가 되었다. 이 전투에서 2.36인치 바주카와 75mm [[M20 무반동포]]의 위력 부족이 확실히 드러나게 된다. 물론 이렇게 형편없는 대전차무기 지원 사실을 안 [[맥아더]]는 미 국방부에 "한국군이 대포쏘는 법 몰라서 이렇게 밀린 건 줄 아냐"며 당장 대전차용으로도 사용이 가능한 대공포인 [[90mm 대공포]]와 [[120mm M1 대공포]]의 공수를 요청했지만 미 국방부는 쿨하게 씹었다. 그 당시 미 국방부는 극동지역에서 대규모 대전차 화력은 필요없을 것이라 판단했던 데다가 120mm의 경우에는 미국 내에도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름대로 엄선한 정예병력이 순식간에 패퇴하는 것을 보고 미국도 북한군의 실력을 점점 제대로 평가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